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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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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어둠의 발소리


서(序)


1장 서희(西姬)
2장 추적
3장 골짜기의 초롱불
4장 수수께끼
5장 장날
6장 마을 아낙들
7장 상민 윤보와 중인 문의원
8장 오광대(五廣大)
9장 소식
10장 주막에서 만난 강포수(姜砲手)
11장 개명 양반
12장 꿈속의 수미산
13장 무녀(巫女)
14장 악당과 마녀
15장 첫 논쟁
16장 구전(口傳)
17장 습격
18장 유혹
19장 사자(使者)

제 2 편 추적과 음모


1장 사라진 여자
2장 윤씨의 비밀
3장 실패
4장 하늘과 숲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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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 11~2장 읽기 / 11~12쪽 부분 발췌 필사]

 

 

1

어둠의 발소리

()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끌어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퍼지는 징소리는 타작마당과거리가 먼 최참판댁에서는 흐느낌같이 슬프게 들려온다.

······

최참판댁 사랑은 무인지경처럼 적막하다. 햇빛은 맑게 뜰을 비쳐주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가버렸을까. 새로 바른 방문 장지가 낯설다.

한동안 타작마당에서는 굿놀이가 멎은 것 같더니 별안간 경풍들린 것처럼 꽹과리가 악을 쓴다. 빠르게 드높게, 꽹과리를 따라 징소리도 빨라진다. 깨깽 깨애깽! 더어응응음-깨깽 깨애깽! 더어응응음-장구와 북이 사이사이에 끼여서 들려온다. 신나는 타악 소리는 푸른 하늘을 방글빙글 돌게 하고 단풍든 나무를 우쭐우쭐 춤추게 한다.

 

[단상]

 

토지라는 책을 처음 완독했을 때 꽤 뿌듯했었다. 긴 대하소설을 다 읽어낸 내 자신이. 그리고 어땠던가? 박경리라는 소설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런 긴 호흡으로 인물 하나하나를 살려내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토지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게 힘들었다. 할 수 있을까? 책 한 권 읽는 것도 시간에 생활에 쫓겨 헉헉 대면서 그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내가 욕심 부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래도 한 번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에.

 

 

* 1/28()   [3~4장 읽기]

 

엄마 데려와! 엄마 데려와아!”

발광하고 울부짖고 까무러치고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그칠 줄 모르는 서희의 패악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봉순네는 넋빠진 것 같았고 비대했던 몸이 홀쪽해졌을 지경이다.

말귀를 알아야 타일러보제. 내가 이거 무신 할 짓인고.’

하다가 봉순네는 불쌍한 서희 때문에 눈물을 훔치곤 했다. 서희는 거의 날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여 물었다.

어머니 어디 갔어?”

서울 가싰지요.”

뭐하러?”

할아버님 뵐라꼬요.”

할아버님이 어디 있는데?”

서울 기시오.”

그럼 나는 왜 안 데리고 가는 거야?”

질이 멀어서 애기씨는 걸을 수가 없인께요.”

가마 타고 가면 되잖아.”

질이 여간만 멀어야제요. 산을 넘고 내를 건니고 또 산을 넘고 내를 건니고 하자믄.”

길상이가 업고 가믄 되잖아.”

, 그렇기는 하겄소만······ 산에는 호랭이가 있십니다. 생이틀 같은 호랭이가 두 눈에 화덕 같은 불을 키고 얼라만 보믄 어흥! 잡아묵을라 안 캅니까.”

잠시 질리다가 다시

그럼 어머니는 언제 와?”

“······”

몇 밤 자면 와?”

“·······”

몇 밤 자면 오느냐고 내가 물었단 말이야!”

무릎을 꼬집다가 서희는 주먹을 쥐고 봉순네 가슴을 쥐어밖는다.”

애기씨가 어른이 되시믄······ 어른이 되시믄 오실 기요.”

봉순네는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흥! 하고 푼다.

어른이 될려면 몇 밤이나 자야 해?”

“······”

, 몇 밤 자면 어른이 되는 거야!”

그래도 대답이 없으면 영근 박같이 팡팡하고 잘생긴 서희 이마빼기에 정맥이 나돋고 부풀어 오르며 기어이 뒹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단상]

 

서희가 참으로 가엾다. 어린 나이에 엄마 품을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모진 일인지!

 

 

* 1/29(수) [5장~7장 읽기 / 88쪽~91쪽 부분 발췌 필사]

 

윤보는 정말 속 편한 사내였다. 훌륭한 목수의 기량을 지녔으면 서로 돈을 탐내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맡아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내켜 일자리로 떠나게 되면 이번에는 설망 몫돈 쥐고 와서 땅뙈기 한 마지기라도 사겠지, 이번에야말로 돈 좀 남겨다가 집 손질이라도 해서 어디 불쌍한 여자 얻어 살지 않을간가 하며 남의 일이나마 이웃들이 기대를 걸어보는데 마을로 돌아오는 그는 언제나 빈털터리였고 다음날부터 낚싯대를 울러메고 강가로 나가는 것이었다. 돈은 벌어서 어디다 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술은 과한 편이지만 여자에게 돈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고 투전판에 드나드는 일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온다간다 말없이 연장망태 짊어지고 훌쩍 더나는데 낯선 마을에 가서 삽짝을 고쳐주기도 하고 외양간을 지어주기도 하여 밥술이나 얻어먹으며 떠돌아 다니다가 돌아오곤 했다. 윤보가 동학당 했다는 것을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윤씨부인도 윤보가 동학당에 가담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사실과 좀 차이가 있었다. 윤보는 동학교도가 아니었고 농민도 아니었다.

······헤 농부도 교도도 아닌 윤보에게 그들과 공통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신분이었고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야심이 없었던 만큼 그네들보다 여유가 있었다면 있었다 할 수도 있겠고 순수했다면 순수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식한 윤보가 혁명에 대한 자각을 가졌었던wl 그것은 의심스럽다. 그의 행동을 일종의 협기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는지.

동학군이 관군에게 전주성을 내어주었을 때, 애당초 무엇을 신봉하고 누구의 지시를 받고 하는, 조직이 싫은 윤보는 마치 집 한 채를 지어주고 나면 연장을 챙겨서 떠나는 것처럼 담담하게 그 대열에서 떨어져나왔다.

······

윤보는 이곳저곳을 좇기기도 하고 숨어다니기도 하면서 떠둘다가 지난 봄에 마을로 돌아왔는데 마을은 윤보에게 발붙이기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동학당 했다는 막연한 소문 이외 윤보의 행적을 소상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까닭인지 최참판댁 윤씨부인은 동학당에 대해서 퍽 동정적이라는 말이 있었다. ··· 그렇다고 해서 윤보가 윤씨부인의 두호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윤보는 윤보대로 최참판댁에 경의를 표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단상]

 

윤보라는 인물과 만났다. 그의 삶의 궤적에 유난히 눈이 간다.

 

 

* 1/30(목)   [8장~9장 읽기 / 112쪽]

 

셈을 끝내고 매운 바람 속으로 나온 용이는 휘청휘청 걷는다. 이가 빠진 거서럼 인가가 듬성듬성한 길을, 쓸쓸하고 매정한 것 같은, 아무도 없는 길을 걷다가 용이는 길켠에서 소변을 본다. 피리 소리 장고 소리가 무척 먼 곳에서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 살이 썪어서 뭉개진 문등이도 양반은 양반이란 말이제? 천하일색 양귀비라도 무당은 무당이라 말이제? .”

바지말기를 치켜올리고 허리끈을 동인 뒤 용이는 휘청거리면서 월선의 주막 앞에까지 왔다.

월선아!”

고랫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문 열어라!”

용이는 문을 주먹으로 쳤다. 문은 주먹 바람에 열리었다. 월선이는 마당에 우뚝 서 있었다.

술을.”

너무 마시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월선이는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술 마시믄 안 되나? 가난뱅이 농사꾼은 주식에 빠지믄 안 되제?”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용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 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 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 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월선의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댄다. 남녀의 눈물이 한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또한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높이 떠올라 가서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단상]

 

눈물.

용이의 울음은 너무 아프다.

둘은 너무 아프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 어느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용이의 마음.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 처음 소설을 읽을 때는 그냥 넘어간 표현이었는데... 소설의 뒷이야기를 알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장이다.

용이와 월선.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

 

 

*  1/31(금)   [10장~11장 읽기 / 131~132, 134~135쪽]

 

함안댁은 보리바에 주질러앉아 풀을 매기 시작한다. 유독 금년에는 뚝새풀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았다.

어서 매고 가얄 건데······’

마음이 바빠 서둘면 서둘수록 일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 바위 때문에 보리가 차지한 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건만 함안댁에게는 한 개의 이랑 끝이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왜 이리 눈까풀이 떨리는고? 귀는 왜 이리 울어쌌을고?

빨갛게 달아오른 함안댁 얼굴에 땀이 솟는다.

반나절을 보리밭에 엎디어 풀을 매다가 점심을 이고 가는 선이를 본 함안댁은 비실비실 일어섰다. 이번에는 얼굴빛이 몹시 창백했다.

아가.”

.”

물 있으면 나 한모금 안 줄래?”

선이는 얼른 이고 있던 통을 내려놓고 엎어좋은 주발에 물을 부어 밭고랑까지 내려와서 함안댁에게 건넨다.

천수만 먹은 것 같구나. 후유잇.”

땀 좀 닦이소. 쉬었다 안 하시고.”

순간 함안댁 눈에 날이 섰다.”

어여 가거라.”

.”

함안댁은 머리꼬리를 흔들며 통을 이고 밭둑길을 가는 선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린것에게까지 동정을 받는 신세, 착한 아이의 마음이 함안댁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

주모는 핀잔을 주었다. 늘 당하는 일이어서 그랬던지 집에서와는 딴판으로 평산은 느긋하게 잘 감당해내었다.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몇 번이가 강포수를 투전판으로 유인하여 그의 밑천으로 재미본 맛을 평산은 잊지 못했다. 한번은 웅담을 헐값으로 빼앗아 몇 곱으로 넘겨판 일이 있었고, 산에서는 귀신이라지만 산밑에 내려오기만 하면 등신이 되는 강포수는 평산에게는 마음대로 궁굴려 볼 수 있는 실속이 있는 먹이였다. 그가 마을에 나타났다면 사냥한 것을 처분하기 위한 것이니 그 주머니 속의 돈이 어디로 가겠는가. 자기 주머니 속에 든 것만큼이나 확실한 돈이다. 평산이 술판을 두드리며 술 사겠다고 기분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상]

 

가엾은, 불쌍한 함안댁

나쁜 놈, 평산.

세상엔 꼭 이렇게 나쁜 놈들이 있다. 악이 존재하는 것 그건 당연한 세상 이치인가?

 

 

*  2/3(월)   [12장~13장 읽기 / 167~168쪽 필사]

 

배는 떠나고 월선은 물가, 축축이 젖은 모래밭을 벗어난다. 말라서 포스라운 모래밭은 발바닥이 폭폭 빠져 발목에 힘이 든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것 같은 백사장, 하늘에는 또 어쪄면 그리 별은 많은지 월선이는 옛날 용왕제를 올리던 제 어미 생각을 한다. 차려놓은 제물이 촛불에 울긋불긋했다. 월선네는 촛불에 소지(燒紙)를 사르어 검은 하늘로 올려보내며 관음보살처럼 유연한 팔짓으로 예배를 올리었다. 흰 치마가 바람에 나부끼었다.

 

우찌 그리 못 살고 왔노, 용이가 그러데요. 우찌 그리 못 살고 왔겄노. 어매, 불쌍한 우리 어매. 팔자치리하고 살라 카더마는 내 신세가 어매 한세상맨티로 우찌 그리 똑같겄소. 짝도 없고 임자도 없고 엄매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았겄느냐고 했더마는······ 너무 보고 저바서 왔소. 용이 사는 울타리라도 한분 보았이믄 싶어서 왔소. 어매, 날 미친년아, 기든년아 하겄지요? 나도 모르겄소. 보고 저바서 미치고 기들겄십디다. 나도 모르겄소.’

 

강물은 제물에 희번듯이고 하늘의 별도 제물에 반짝거리고, 꺼무한 산허리만이 헤매는 월선이를 가만히 지켜본다.

옛날 시집 안 가겠다고 울었을 적에

이 미친년아, 이 기든년아, 그라믄 태일 데 태이나지 와 무당 문전에 떨어졌더노! 미친년아, 기든년아, 와 내 간장에 이리 못을 박노!”

괄괄하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사내같이 잔정이 없는 월선네는 딸의 등을 치면서, 그러나 그도 울었다.

 

[단상]

 

20년도 더 넘은 대학 1-2학년 때 토지를 읽었다. 완결된 토지를 덮으며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용이월선의 사랑이야기였다. 그 때 나는 이십대 초반 사랑이란 것이 가장 중요하던 때라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막연히 생각했었다. 이젠 마흔도 훌쩍 넘은 나이, 다시 이 소설을 읽기로 시작하며 생각했다. 내 감정은 감정도 나이가 먹어 꽤 무뎌졌고, 아직도 월선용이의 이야기가 여전히 그렇게 아련할까? 여전히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용이랑 월선이가.

 

 

*  2/4(화)   [14장~15장 읽기 / 188쪽]

 

양기가 모자라는 지 어쩐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제요.”

?”

그 양반 양기가 모자라는 기이 아니요. 본시부텀 여잘 가까이 안 허니께.”

해놓고 귀녀는 다시 킥하고 웃었다. 밝았으면 평산의 얼바진 얼굴을 좀 봐주겠다 하듯이. 그러나 평산은 당황하거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지. 그러니 안타깝다는 게야. 귀녀 나부대는 게 말이야.”

평산은 일어섰다. 그는 귀녀에게 바싹 다가섰다.

귀녀.”

귀녀는 순간 막연해지는 모양이었다. 평산도 내심 막연함을 느끼었다. 황금의 더미가 소리도 없이 흐트러져가는 것 같았고 희한한 꿈을 깨고 난 늙은이가 뼈다귀 같은 천장의 서까래를 바라보는 허무한 마음, 그러나 절망은 아니었다. 손을 뻗치기만 하면, 좀더 안간힘을 쓰기만 하면, 뭔가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귀녀와 평산은 꿈이 무너질 것 같은 허망함에서, 그 공통적인 심리 때문에 그들은 말로보다 더 강하게 손을 잡았음을 느꼈다. 손을 잡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다는 기대만이 이들의 허망한 순간을 구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되는 수가 있다. 너하고 나하고 의논이 맞기만 하면, 알겠나? 좀 기다려보면은 되는 수는 반드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알겠나? 내가 주선할 테니 니는 어떡허든 애만 배면 된다. 종년이 그만큼 큰마음을 먹었다면 끝장을 내야지, 아암.”

 

[단상]

 

평산과 귀녀같은 이들이 어디에든 꼭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차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싶어 하는 이들. 건강하게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고 다른 이의 것을 가로채려고 하는 사람들.

 

 

*  2/5(수)    [16장~17장 읽기 / 213쪽-214쪽]

 

삼신당 앞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 쇠고리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신당 안을 저벅저벅 밟는 발소리, 마룻장 울리는 소리가 난다. 한동안 기척이 없더니

삼신제앙님네, 목신제앙님네.”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태산제앙님네, 천조랑씨제앙님네, 은조랑씨제앙님네, 열아홉 살 묵는 김씨방성 씨종자 아들이 소원이요. 최씨 가문의 씨종자 아들 하나가 소원이요.”

준구는 눈이 휘둥그래진다.

최시 가문의 씨종자라니? 저년은 귀녀 아닌가.”

곁눈질로 치수를 보는데 치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귀녀의 축원하는 소리는 계속하여 들려온다. 아마 수없이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축원하는 목소리는 멎고 발소리는 삼신당 밖으로 사라진다. 숲속에서 팔매같이 날아가며 소쩍새는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대단한 욕심이군 그래.”

어처구나없다는 듯 뇌다가 준구는

아아니 이 사람아 자네 저녁을 건드렸군 그래.”

하고 껄껄 웃는다. 치수도 따라서 껄껄껄 소리를 내어 웃어젖힌다.

썩 재미있지 않소?”

허허어 참, 그년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대단하게 들었구먼.”

만석꾼 살림이 눈앞에 얼른얼른했을 게요.”

자네도 죄가 많네.”

치수는 웃던 웃음을 멈추었다. 껄껄 하던 웃음은 맥이 차츰 빠져서 허허허 하다가 눈에 독기가 번득 섰다.

그년을 내가 건드려요? 안 건드리고 바라보는 재미가 어떻다고 건드립니까?”

?”

집념이요.”

“······?”

계집의 집념에는 사내가 따를 수 없지요. 욕심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조그만한 욕심, 조그만한 원한, 미움만으로도 살인하는 일이 허다하죠.”

그게 무슨 소린가?”

최씨 집안의 살림은 여자 집념의 상징 아닙니까?”

 

 

[단상]

 

제 것이 아닌 것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귀녀집념을 이미 알고 있는, 그리고 최씨 집안 여자의 집념을 이야기 하고 있는 치수... 서희도 그 집념을 이어받았으리.

 

 

* 2/6(목)   [18장~19장 읽기 / 244~245쪽]

 

벌은 산 놈이었다. 날개가 상하였는지 날지 못한다. 영금엉금 기어가는 벌한테 개미 네댓 마리가 덤벼드는 것이다. 엉덩이에 오라탄 놈, 등에 올라탄 놈, 다리를 물고 늘어진 놈, 벌이 뒹군다. 사방에 날아떨어진 개미들은 미친 듯이 맴을 돌다가 그악스럽게 다시 덤벼든다. 잔인하고 무서운 아귀다. 아이들은 머리를 마주대고 땅을 내려다본 채 꼼짝없이 곤충의 격투를 지키고 있다.

애기씨.”

“······”

요눔으 개미새끼들 직이부립시다.”

안 돼.”

응원의 전령을 받았음인지 더 많은 개미들을 달려왔다. 디뚝디뚝 걷다가 딩굴곤 하던 벌이 이젠 딩굴기만 한다.

아냐.”

불쌍하요.”

봉순이 딩구는 벌에게 손을 내민다. 서희는 봉순이를 떠밀었다. 뒤로 나자빠지면서

, 불쌍치도 않소!”

누가 이기는지 볼 테야.”

봉순아 뭐하노.”

길상이 얼굴을 쑥 디밀었다.

이기이 멋꼬?”

, 개미놈들이 벌을 잡아묵을라 칸다. 죽지도 않았는데,”

길상의 손가락이 어느새 벌을 낚아챘다. 개미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머야앗!”

서희가 고함을 쳤다. 그러나 길상은 날개가 상하고 기진맥진한 벌을 소중하게 싸들고 가서 백이홍 나무의 그 분홍 빛깔 꽃 속에다 넣어준다.

꿀 묵고 정신차리라.”

발을 구르며 서희는 울부짖었다. 길상은 무정한 눈을 하고 울부짖는 서희를 쳐다 본다.

나쁜 놈! 중놈! 소금장수! 거짓말쟁이! 토끼도 못 잡는 덩신!”

 

[단상]

 

필사한 부분은 서희, 봉순, 길상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 서희와 이 인물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복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2/7(금)   [2편 1~3장 읽기 / 300~303쪽]

 

밥이 끓어오른다. 강청댁의 마음도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용이 아파 누워 있는 것을 생각하여 참아온 신경질이지만 월선이를 못 보아 병이 났을 거라는 짐작은 눈앞이 캄캄해지게 분노를 끌고 왔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된장도 안 얹고 밥을 안칬네.”

강청댁은 뚝배기를 들고 부리나케 장독으로 쫓아간다. 된장 항아리 뚜껑을 열다 말고

아니 보소.”

용이 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자 좀 낫소?”

빛 잃은 눈이 강청댁을 멍하니 쳐다본다.

이자 좀 나앉일 만하요?”

“······”

죽이라도 좀 잡사볼라요?”

“······”

사램이 말을 하는데 우찌 그리 모질고 독한고.”

“·······”

두만아배한테 약 지어오라고 돈 주고 왔소. 두만아배는 벵자가 가서 진맥을 하고 약을 지어와도 지어와얄 기라고 하더마요. 아 사람 그만 애 그만 태우고 머라꼬 말 좀 하소!”

약 묵는다고 나을 벵가.”

처음으로 대꾸했다.

그라믄 우찌 하믄 나을 벵이요?”

“······”

무당 불러 굿하믄 낫겄소?”

“······”

절에 가서 치성드리믄 나을 벵이요?”

“······”

상사바우에 가서 상사굿을 하믄 쓰겄소?”

용이는 그냥 말이 ㅇ벗다.

, 그라믄 보고 저븐 년을 못보아서 난 벵이다 그 말이요? 음내에 가서 그년 데리고 오믄 벵이 나을 기라 그 말이요?”

시끄럽다!”

“······”

더 시브리믄 기둥뿌리를 파부릴 기다!”

마치 맹수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창백했던 얼굴에 피가 모여들고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부풀어올랐다.

흥 그년 말을 하니께 붙었던 입이 떨어지누마. 데리고 올 것도 없이 가지, 가아. 가란 말이요! 가성 영 오지 마소! 그래야 내가 과부팔잘 멘하제. 나 잡지 않을 기니.”

부엌의 밥이 숯덩이가 되어도 아랑곳없다. 된장 뚝배기를 손에 든 채 강청댁은 악을 썼다.

그 계집 말을 더 입 밖에 내었다만 봐라! 집구석에 불을 싸질러 버릴 기다!”

강청댁은 뚝배기를 항아리 뚜껑 위에 내동댕이치고 삿대질을 하며 용이 앞으로 달려간다.

멋이 우짜고 우째요? 그년 말을 와 내가 못할 기요! 옥황상제 딸이라서 말 못하겄소? 임금님 딸이라서 말 못하겼소! 헤치구덕에 꾸중물 겉은 더러운 년! 똥파리겉이 아무데다 붙어 엉기는 더러운 년을! 잡신이 붙어서 만나는 쪽쪽 사나아 간을 끄내묵는 구미호 같은 년! 그년 말을 머가 무서바서 내가 말 못할 기요! 초가삼간 불지르소! 나도 살기 싫으니께 싹 질러부리고 끝판을!”

입에 거품을 물고 병든 남편에게 달려들어 쥐어뜯을 기세를 보인다. 용이는 이를 갈았다. 이마에 기름땀이 배어난다. 강청댁은 마루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펄쩍 주질러앉는다. 두 다리를 뻗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내 팔자야!”

얼굴이 붉다 못해 검푸르게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용이 눈이 잔인스럽게 번득였다.

그만 그년을 직이고 나도 죽을 긴데, 아이고 붆아고 원통해라! 내가 머할라고 오밤중에 거까지 갔었던고! 오고가고 육십 리 길을 그년 낯짝 보러 갔었던가, 그년을 못 직이고 와서 이리 한이 된다! 이리 한이!”

강청댁은 제 가슴에 주먹질을 한다.

그년 입술 끝에 분은 말을 곧이듣고 내가 속았고나! 갈갈이 찢어직일 긴데, 이 실개 빠진 년이 육심 리 길을 그냥 가서 돌아왔단 말가! 아이고 분하고 원통해라! 나의 서방 뺏는 년을 다리모당이 하나라도 와 못 뿌질렀던고!”

용이 일어섰다.

, .”

아이고오! 분하고 원통하고오!”

, 거기 갔고나.”

갔소! 가고말고! ! 내가 못 갈 데 갔소? 그년 머리끄덩이 잡고 복날 개 패듯이 패주었소! 불쌍하겄구나! 아깝고 간장이 녹겄구나! 우떤 년은 팔자가 좋아서 아깝고 불쌍하겄고나!”

용이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다.

마루에서 내려섰다. 강청댁 곁으로 다가간다. 강청댁의 악다구니가 멎었다. 용이는 강청댁의 머리채를 낚아쳤다.

아이구우!”

용이는 머리채를 휘감아 강청댁을 질질 끌고 간다. 까대기 앞에까지 가서 발길로 걷어찬다.

아이구우- 나 죽네!”

불가사리 겉은 년!”

한마디 내뱉고 집세기를 찾아 신은 용이는 사립문 밖으로 휑하니 나간다.

햇빛은 물방울 같이 공중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바라다보이는 읍내길에는 장을 보러 가는 장꾼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강가둑에 소를 내버려두고 목동들은 물장구를 치며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그랬고나, 그랬고나!’

 

[단상]

 

용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월선, 그런 월선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용이. 둘 다 참 가엾다. 강청댁의 성정이 조금만 고왔더라면, 아니 평범하기만 했더라도 용이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다른 곳으로 향하진 않았을 것 같다. 아니, 적어도 용이는 월선이에게 향하는 마음에 강청댁에게 많이 미안해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지아비의 마음을 잃은 강청댁이 안쓰럽게 느껴져야 할 텐데. 모질고 독하기만 한 강청댁이 미워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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